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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 | 2019년 1월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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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상사 작성일19-01-28 11:40 조회1,8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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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보현법회

 

 

◎ 회주스님 모두 법문 - 인도성지순례이야기

사부대중이 물심양면으로 마음도 모아주시고 힘도 보태주시고, 절도 잘 지켜주신 덕택에 인도를 잘 다녀왔다. 함께 갔던 분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이다. 인도 다녀왔으니 특별한 얘기가 있어야하지 않겠나. 한 달에 한 번 하는 법회인데 이번에는 무슨 얘기를 할지 고민이 됐다. 다른 때는 같은 일상을 겪으니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아쉽거나 허물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인도를 다녀왔으니 특별한 얘기를 해야 한다고 기대를 하게 되고, 그에 화답하는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고민이 되었다.

 

붓다가 거룩한 이유 중도의 팔정도를 삶으로 살았기 때문

원칙적인 이야기부터 할 수 밖에 없겠다. 붓다는 신인가, 사람인가? 붓다는 사람이다. 사람인데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똑같은 사람인데 깨달음의 내용인 중도의 팔정도행으로 삶을 가득 채우신 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을 성인이라고 한다. 깨달음으로 거룩한 삶을 산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성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경전이나 법문 상에서 무엇을 거룩함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지 혹시 알고 있나? 붓다가 살아계실 당시에도 붓다에 버금갈 정도로 기라성 같은 인물이 많이 있었다. 진짜도 있고 가짜도 있었다. 세력도 크고 제자도 많은 지도자들이 있었다. 누가 진짜 거룩한 사람인지 쉽게 알 수가 없었다. 서로 거룩한 사람이라고 자신이, 혹은 추종자들이 주장하지만, 다 진짜인 것 같지도 않고 다 가짜인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붓다께 어떤 사람이 진짜 거룩한 사람인지 묻는다. 붓다는 그들의 삶에 중도의 팔정도가 있으면 진짜라고 답했다. 중도의 팔정도가 없으면 진짜도 아니고 거룩한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붓다가 거룩한 이유를 신비한 깨달음이라고 한다. 주로 우리를 혹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초인적이고 신비한 능력이다. 전생·내생을 보거나, 물 위를 걷거나, 하늘을 날거나 병을 낫게 또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거나. 우리가 원하는대로 소원을 이루어주는 신통력을 생각한다. 말은 깨달음이라고 하지만 그 깨달음도 매우 신비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신적 능력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붓다는 전생·내생을 보는 것을 거룩하고 위대함이라고 한다면, 나 못지않게 전생과 내생을 잘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그 능력이 있다고 해서 나를 거룩하고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 또는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기 때문에 나를 거룩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훨씬 더 검소하고 소박하게 사는 사람 많이 있다. 그러므로 그렇게 사는 것만으로 나를 거룩하고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 무소유의 삶을 살기 때문에 붓다가 거룩하고 위대하다고 하는데 인도에는 나보다 더 철저하게 무소유로 사는 나체 수행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무소유의 삶 때문에 거룩하고 위대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럼 진정 거룩하고 위대한 것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붓다가 거룩한 이유는 중도의 팔정도를 삶으로 살기 때문이다.” 라고 매듭짓고 있다. 경전의 내용을 가지고 현실로 와 보면 중도의 팔정도를 현실의 삶으로 사는 사람, 그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다.”라고 할 수 있다. 붓다가 바로 중도의 팔정도를 삶으로 사는 분이다. 그러므로 그가 거룩한 성인인 것이다. 장소로 말하면 중도의 팔정도를 보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내가 삶으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곳이 거룩한 곳이다. 중도의 팔정도를 삶으로 사는 사람이 모여 사는 곳, 중도의 팔정도를 보고 배우고 익혀서 삶으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곳이 거룩한 곳이다.

 

중도의 팔정도를 보고 배우고 익혀서

삶으로 살게 해주는 곳, 그곳이 바로 성지

이번 성지순례는 붓다의 일생에서 중요한 사건인 태어난 곳, 깨달음을 이룬 곳, 설법하신 곳, 돌아가신 곳, 4대 성지를 순례했다. 그런데 성지에 중도의 팔정도를 삶으로 살았던 성인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신이 된 부처님만 모셔져 있었다. 규모로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훨씬 더 거대하고 장엄하고 아름답게 모셔져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순례객들이 어마어마했다. 마치 아침 출근길 지하철역처럼 혼잡스러웠다. ‘중도의 팔정도를 삶으로 산 붓다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중도의 팔정도를 삶으로 살았다는 것이 이런 내용이구나.’ 하고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성지에 오는 사람들도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인간 붓다를 보고 배우려고 오는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대부분 신이 된 영험한 부처님으로부터 가피를 받으려는 차원에서 성지에 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생 인간 붓다를 붙잡고 산 사람의 입장에선 붓다가 살았던 성지를 순례하면 한국에선 잘 알 수 없었던 거룩한 인간 붓다를 제대로 알고,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으리라는 바람을 가지고 갔었는데, 매우 허탈했다. 짧은 시간에 피상적으로 돌아보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사찰을 순례하는 것과 그리 다른 것이 없었다.

경전에 보면 붓다는 일생 밥을 얻어 드셨다. 인도 촌락은 우리 50년대, 60년대 그 수준이다. 가난에 찌든 마을길을 걸어가서 식구들 끼니를 걱정하는 가난한 집 앞에 가서 밥을 얻어먹었다. 어떤 때는 밥을 못 얻어서 빈 발우를 들고 터덜터덜 쓸쓸히 돌아오기도 했다. 그야말로 사람붓다이다. 대한민국 어느 절에서도 인간 붓다를 볼 수 있는 곳은 없다. 우리가 모셔야만 하는 신과 같은 불상만 존재한다. 인간 붓다가 맨발로 논둑길을 걸어 다녔다는 인도의 절들도 더하면 더했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사대성지 중 역사 현상에서 살았던 인간 붓다를 느끼게 하는 곳은 없었다. 건물로는 화엄사 각황전, 붓다상으로는 법주사 미륵대불처럼 신전과 신상과 같은 모습들이다. 유적지들도 경주 황룡사지, 익산 미륵사지보다 십수배도 더 큰 어마어마한 규모이었다. 내 나름대로 성지순례의 현장을 본 느낌이 이렇다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친구따라 강남 가듯이, 좋은 뜻으로 만들어진 인연따라 간 것이기 때문에 의미있고 유익한 순례가 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순례에 집중했다. 최종적으로 정리된 것은 거룩함은 중도의 팔정도라는 것. 따라서 불교를 하는 사람들의 살림살이도 중도의 팔정도가 실제 삶이 되도록. 실상사도 중도의 팔정도행으로 꽉 채워지는 절이 되도록.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 스스로가 거룩한 사람이고 그 현장이 성지이다.’하는 생각을 하며 왔다. 내게는 그런 부분을 명확하게 정리한 것이 큰 성과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아주 본질적인 것만 짚어서 말씀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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